글 | 강다원(독립 큐레이터)
Room Number.000
황유윤 개인전
Room Number.000
황유윤 개인전
소실되는 흔적
호텔 청소부는 투숙객의 흔적을 남김 없이 지운다. 투숙객이 떠나는 순간 청소는 시작된다. 객실 문을 연 순간 누군가가 정돈된 환경을 마주할 수 있도록, 호텔은 항상 단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일을 반복한다. 호텔은 그렇게 인간의 자취를 의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유지의 조건을 충족하고 처음의 상태를 순환시킨다.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숙박시설은 기묘한 공간이 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서 투숙객은 옆 방에 머무르는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없다. 그들 생활의 흔적을 없애는 것이 호텔의 원칙 하에, 사람들은 ‘비장소’2)를 경유하고, 공간은 다음이에게 넘어 간다.
임시적인 폐쇄성을 넘겨 받은 투숙객들은 다른 사람의 방을 쉽게 침범할 수 없다.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어느 고요한 하루에, 낯선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상상은 섬뜩하게만 느껴진다. 긴 복도에 칸칸이 들어선 방, 그 방을 굳게 막고있는 벽과 간헐적으로 열리는 단단한 문 안에는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두가지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사물들의 호텔
황유윤은 수집품을 그린다. 각각의 회화는 소품들을 그린 작품으로, 또다른 사물 object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소품과 회화를 통칭할 수 있는 ‘사물’, 바로 그러한 ‘사물들의 호텔’이라는 주제로부터 출발한다. 황유윤이 모으고 그린 물체들이 잠시 머무르는 장소는 바로 이 전시 공간, 호텔이다.
호텔과 전시 공간의 유지 원리는 서로 닮아있다. 반듯함을 유지해야 하는 이 두 구역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듯 보이지만, 언제나 처음과 흡사한 환경처럼 보여야 한다. 작품과 사물들은 정해진 시간 동안 임시적으로 머무르고 공간을 떠난다. 인간이 이동시키지 않는 한, 작품들은 전시 기간 동안 같은 위치에 고정되어 있으며, 방의 사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간이 작품과 사물을 손으로 집어 들어 위치를 의도적으로 바꾸지 않더라도, 고정된 물체들은 변할 수 있다. 변화, 즉 물질 자체의 움직임을 포함해 시간의 축적에 따라 달라지는 일 말이다. 황유윤이 수집하여 지금은 회화 안에 머무르고 있는 어떤 빈티지 인형이 집 어딘가의 선반에 말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아무런 임의의 손길이 가닿지 않더라도 시간이 흐르며 물건의 표면은 미세하게 닳고 본래의 색을 잃는다.
혹은 좀 더 적극적인 상상을 가해, 인간이 방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 주문이 시작되듯이 인형들과 물건들이 돌아다니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오랫동안 방치된 낡은 인형의 머리카락이 서서히 자란다는 괴담이나, 어느 순간 시야에 들어온 사물들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보이는 듯한 감각은 인간이 느낄 수 없는 시공에 ‘살고’ 있는 물건들을 향한 기묘한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
사물의 생활
우리가 방을 떠난 순간, 영영 열리지 않을 호텔 옆 방의 문 안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마음으로, 전시는 사물들의 생활生活을 상상하고 그들이 움직이는 바깥의 세계를 바라보기를 제안한다. 무언가를 꺼내어 보여주는 전시ex-hibitiion가 공개의 시간대를 주요한 축으로 삼는다면, 황유윤이 만들어 낸 호텔은 낮에서 밤으로 흐르는 일반적인 시간대에 어긋나 있는 듯하다. 마치 굳게 닫힌 어느 옆 객실에 잠시 드나들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은 듯, 관객은 사물들의 내밀한 방으로 진입한다.
전시 공간의 문이 열리는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사물들은 벽에 얌전히 붙어 있다. 그러나 남은 이른 새벽과 늦은 밤의 시간에 사물은 어떻게 될까. 인간이 올 수 없는 시간대에도 공간 안에 소품들은 분명히 있다. 다음 날 1시가 되고 고요한 공기를 깨고 문이 열리면 사물들이 생활하는 시공의 문은 반대로 닫힌다.
수집을 향한 애정으로 쌓은 사물들을 하나 하나씩 그려 나가며, 황유윤은 캐비닛이나 창고가 아닌 호텔에 이들을 모았다. 공개하기 위한 목적을 넘어서 사물의 관점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 이름 붙였다. 작가가 할 수 있는 가장 애정의 행위에서부터 펼쳐진 이 공간은 분명히 애착의 감정에서 비롯되었으나 기이한 호텔로 둔갑하여 낯선 투숙객의 입장을 기다린다.
1) 글의 제목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샤이닝 THE SHINING>(1980)의 무대가 되는 ‘오버룩 호텔’에서 착안했다. 극 중 폭설로 인해 외부로부터의 접근이 끊긴 오버룩 호텔은 현실적이고 이상한 일들이 발생하는 공간으로 그려지며, 호텔의 폐쇄적인 공간 특성은 관객의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요소로 기능한다.
2) 마르크 오제에 따르면, 초근대성의 비장소는 고독한 계약성을 창조한다. 비장소의 공간은 스펙타클의 한 요소로, 지금 이 순간의 현재성과 긴급성이 비장소의 공간을 지배하고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다닌다. 오제는 고속도로, 주유소, 대형매장, 혹은 호텔 체인을 유랑하는 이방인들이 익명성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고 보았다.
(마르크 오제, 『비장소-초근대성의 인류학 인문』, 이상길, 이윤영 옮김, 아카넷, P.115-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