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강다원(독립 큐레이터)
그리기의 연출
황유윤의 회화 속 사물들은 무대 위 소품들이 극의 시작 전, 고요한 시간 속에 놓여 있듯 가지런히 멈추어 있다. 1912년 음악 비평가 슈토로크(Karl Storck)가 ‘헬러라우 축제극장’을 두고 텅 비어있는 직사각형의 공간, “절제되어 침묵하고 있는 공간”1)이라고 말한 것처럼, 황유윤에게 평평한 캔버스는 소품들이 들어오기를 대기하는 무대가 된다. 캔버스는 어떤 것을 담는 그릇, 무언가가 들어올 공간, 여 백 그 자체로 기능할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물체들이 곧 ‘세워질(set up)’ 영역이라고 상상해 본다. 캔 버스가 무대라는 불친절한 비유는 그의 그림이 연극처럼 현실에 기댄 허상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황유윤의 작업에서 공백의 캔버스가 무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현실세계를 충실히 묘 사하는 기법의 측면이 아닌, 무대를 연출하는 듯한 작업의 과정에서 도출된다.
황유윤의 회화를 처음 보고 든 감상 중 하나는 견고함이었다. 그러한 첫인상과는 달리, 작가는 본인이 모아 온 애착이 깃든 주변의 소유물들을 회화의 대상으로 선정한 다음 캔버스 프레임 안에 배치하는 작업 방식을 실천해 왔다. 그들과 함께 오래도록 머물러 있고 싶은 소유의 마음이 무수한 물건들을 그 리게 한 것이다. 수집한 골동품으로 방을 꾸미는 작가의 취미와 회화를 완성해 나가는 것을 연계한다 면, ‘그리기’에 대한 접근은 무엇보다도 중요해진다. 황유윤의 작업은 ‘어떤 것을 그릴 것인가’에 그치 지 않고 ‘어떻게 둘 것인가’에 대한 배치의 고민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다시 공백의 무대를 떠올리며, 회화를 무대 위 정지된 한 장면(scene)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하나의 장면에는 배경과 사물 이 있듯이 황유윤의 회화에서는 어딘가에 사물이 놓인 광경이 묘사된다.
배경이 오려진 자리
2023년 황유윤은 사물들의 집합이 형성한 실루엣과 그 배경을 분리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복수의 물 품들은 한 덩어리의 모호한 형태로 추상화되고 그것이 마치 오려진 듯 배경으로부터 떨어져나가 원래 의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상태로 남게 되었다. 사물에 대한 작가의 애정 혹은 소유욕과 멀어진, 공허한 흔적만 남은 상태는 <완벽한 대상을 그리는 방법>(2023)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림은 배우나 소품이 사라져 비어버린 무대 공간이 여러 겹 쌓인 형태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회화는 이야기가 끝난 후의 고요한 무대와 달리 ‘아무것도 없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무언가가 의도적으로 삭제된 장들의 중첩 은 어떤 것이 있었으리라는 믿음을 남겨 둔다.
그 외의 다른 작품들에는 골동품 찻잔, 촛대, 오브제와 같은 소품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그들은 종종 쌍을 이루고 안정적인 구도로 연출되어 색면 배경 위에 차곡차곡 얹혀 있다. 2023년 YPC에서의 기획 전 《네버 본(Never Born)》에서 작가는 캔버스 뒷면의 틀을 선반 삼아 작은 회화들을 올려두는 디스플 레이를 시도했다. 개별 회화들을 또다른 정물, 즉 대상으로 인식하고 수직적인 구조물에 배치한 것이 다. 작품의 배치와 작가가 종종 사용하는 단어인 ‘사물화’를 연동하자면, 작가는 본래 단어가 함의한 부정적 정의에서 멀어져 어떤 것도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열린 시야 내에 사물을 배치한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것들은 무대 위에 올라갈 수 있는 지위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2024년에 접어들며 작가는 대형 캔버스에 회화 작업을 진행하며 배경과 대상을 거의 동시에 그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정물과 배경은 중첩되어 모호한 화면으로 그려졌다. 이는 작가가 지난 해 배경과 대상의 엄격한 분리를 실천했던 것과 구별되며, 추상회화를 연상시키는 붓자국의 일렁임이 돋보인다. 사물과 배경이라는 두 층위가 겹쳐있으면서도, 자세히 보면 왼편에서 들어오는 조명 빛으로 인해 바닥에 맺힌 그림자는 이 물건들이 어떠한 공간에 나열되어 있음을 짐작하는 단서이다. 한편 사 물의 정적인 특성과 달리 빠른 속도로 지나간 붓질은 현실에서 시각적으로 감지하기 어려운 공기의 흐 름, 혹은 물질의 미세한 떨림의 재현이다.
사물을 위한 집
캔버스에 유기적으로 배열될 예정이었던 배경과 대상들을 분리하거나, 붓터치로 정지된 공간의 자취를 남겼던 그간의 흔적을 따라가다보면, 구실적인 존재가 등장함에도 비현실적인 분위기로 표현된 <트리하 우스>(2024)에 다다른다. 황유윤은 ‘나무를 위한 집’을 지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 했다고 말했다. 쉼의 장소이지만 모두가 안락함을 누릴 수는 없기에 이상적일지도 모르는 공간, 집. 작 가는 우리의 일상 어디에나 있어 쉽게 지나쳐온 나무들, 그리고 나무로 만든 물건들을 위해 안전한 공 간을 만들어주고자 그림을 그렸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집의 방 안에는 각종 나무 물건들이 들 어가 있다. 잠시 집의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 보면 모형인 듯 평평한 목재 소품이 다시 등장하는데, 집 이외의 공간이 야외일 것이라 믿는 의심을 비튼다. 여기에서 거리의 집을 바라보는 풍경이 아닌, 실내 의 실내라는 중복된 구성이 기묘함을 유도한다. 작은 집 속의 분재, 액자 그리고 그 안과 밖의 나무 모형들은 상상의 소재가 아니라 DIY 키트나 연극 무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현실의 것이지만, 그들을 담고 있는 집이 넓은 관점에서는 다시 소재-사물이 된다는 점에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세계와 거리 를 둔다. 배경이 다시 소재로 환원되면서 화면 내에서 두 요소는 계속 교체된다.
배경과 사물 중에 무엇이 먼저일까? 공백 위에 사물이 놓인다면, 그 물질은 또다른 배경이 될 수 있 을까? 완결된 회화는 다시 새로운 대상이 될 수 있을까? 황유윤의 회화를 보며 느꼈던 의문, 굳이 작 가의 것이 아님에도 무수한 그림들을 보며 떠올렸던 질문들은 그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과 실제 환경에 그들을 올려두었던 지난 작업들을 반추하며 그러한 질문의 답변을 떠올린다.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황유윤의 캔버스 무대 위 물체가 등장하거나 나무 집이 세워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용하는 도구, 한정된 감각 기관으로만 인지하는 존재들은 침묵한다. 황유윤은 사려깊은 상상을 동원하여 그러한 존재들을 결코 이 용되거나 버려질 일 없는 세계-무대로 불러낸다. 이는 그들이 오래 기억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객체로 남는 일이다.
1)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연극이 등장하기 전까지, 연극에서는 원근법의 도입으로 ‘프로시니엄 아치’ 즉 ‘액자틀무 대’를 적극 도입하여 관객에게 현실과 분리된 공간에서 연극을 감상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그러나 액자 틀무대가 시각적 환영을 통해 관객을 ‘속이는’ 행위라는 인식이 강조되어 20세기 초 ‘헬러라우 축제극장’을 시 작으로 극적인 효과보다는 텅 빈 공간을 제안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 연출 기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캔버스의 빈 화면에 일상의 물건을 그릴 때, 극적인 표현이 아닌 침착한 관찰을 경유해 그림을 그 리는 황유윤의 작업 방식과 연계하여 ‘헬러라우 축제극장’에 대한 슈토로크의 평가를 인용하였다. (이재민, 『공 간무대의 미학-아돌프 아피아와 윌리엄 포사이스의 작품을 중심으로』, 드라마연구, 2016, pp.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