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X예술학 오픈 스튜디오 비평 매칭 2025
비(飛)소유-하기, 황유윤
비평/권유빈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학부 예술학)
다른 방식으로 갖기
늙어가거나 낡더라도 죽어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 시간은 앞으로 흐르면서,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황유윤의 회화는 영원한 것을 갖고 싶다는 수집 충동에서 출발한다. 이런 마음은 단순히 사물을 손에 넣으려는 욕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물이 영원하게 감각되는 존재로서, 완전히 붙잡히지 않으면서도 분명하게 소유될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로 확장된다. 역설의 가능성을 엿보기 위해선 동반되는 여러 질문에 바지런히 답해야 할 것이다. 영원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또 어떻게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가···. 그 이전에, ‘사물’이란 무엇인가. 황유윤은 조형 언어를 통해 천천히 응답함으로써, 영원히 사는 사물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가지려고 한다.
나는 황유윤의 회화에서, 사물이 ‘잠시’ 캔버스에 정박하다가도 다시 흩어질 수 있도록 만드는 비(飛)소유의 태도를 보았다. 특히 액자 틀처럼 보이는 프레임과 이미지가 그려진 캔버스를 분리하여 제작한 <Brooch, brooch, brooch…>(2024)에서 황유윤의 탐구 주제는 선명하게 시각화된다. 서로 반대 방향을 바라보는 두 새의 어우러짐은 소유로서의 조형(프레임)과 사물(캔버스)이 충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탐구하는 시도로 읽힌다. 일반적으로 프레임은 사물을 고정하는 틀이자 지금 이 순간으로 액자의 내용물을 가져오려는 시도라면, 캔버스는 축적된 시간의 흔적을 머금은 매체라는 점에서 황유윤의 시간과 사물이 겪는 시간의 긴장이 그의 작업에서 핵심적이겠다. 즉, 황유윤은 어떻게 조형으로써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소유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이는 곧 시간 속에서 사물과 관계하는 방식이 어떤 조형으로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조화는 시간이 지나도 끊임없이, 다르게 감각될 수 있는 여백을 남기는 공간의 구축으로 구현된다. 그리하여 황유윤은 사물을 완전하게 가지지 않으며, 사물들은 황유윤이 만들어낸 공간에 일시적으로 머무르면서 영원히 낡는다.
외곽 없는 불멸
황유윤은 ‘무엇’을 갖고자 하는지 자문하였다. 작업의 출발 지점에선 사물을 봄으로써 시각적으로 만나는 단계를 거쳤으나, 그 사물이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표면만으로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세잔이 인상주의와 다른 방향으로, 사물의 순간이 아닌 지속되는 감각을 그리려 했듯이. 황유윤은 사물성을 탐구하기 위하여 직접 수집한 촛대에 양초를 끼워 촛농이 흐르는 형태를 관찰하기도 하였다. 이 실험은 내가 만지지 않더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모양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즉 황유윤이 형상을 변화시키지 않았더라도 황유윤에게 다른 형상으로 다시 떠오른다는 점을 감각적으로 드러내었다.
그렇게 소유하고자 했던 ‘무엇’은 황유윤이 아직 마주할 수 없는 형상을 스스로도 모르는 채로 존재한다. 즉, 황유윤이 알고 싶었던 사물의 본질이란, 감각 속에서 단번에 파악될 수 있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며 달라지는 형상의 가능성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형상의 가능성은 작가의 말대로 기억 속에서 펼쳐지며, 이는 베르그송의 지속(duré e)개념을 통해 잘 이해된다. 지속이란 과거-현재-미래가 정확하게 구분되지도 않으며 공간처럼 구획되지 않는, 연속적인 시간의 개념이다. 순수지속으로서의 시간은 시계로 측정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주관적이기만 하지도 않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사물을 바라보거나 기억할 때, 매번 다르게 감각할 수 있다. 이 감각은 반드시 사물을 보지 않더라도 기억 속에서 다시 떠오를 때도 작동한다. 지속되는 시간은 사물이 겪어낸 시간과 황유윤의 시간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도록 기능한다. 즉, 황유윤의 시간과 사물에 축적된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회화가 탄생한다. 지속의 흐름 속에서 사물은 단순히 회상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통과하여 새로운 가능성으로 창조되는 것이다.
계속-하는 곳
황유윤은 하나의 오브제에 다른 시간성을 병치해 보기도 한다. <Personal objects>(2024)는 황유윤이 직접 수집한 열쇠함 안에 자신의 작업을 끼워 넣은 작품이다. 지나온 시간을 간직하는 열쇠함과 지금-황유윤의 개입으로서의 드로잉은 한 화면에 나란히 있다. 주목할 점은, <Brooch, brooch, brooch…>(2024)의 프레임-이미지에 내재된 전통적인 시간성이 전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래된 열쇠함은 프레임으로써, 끼워진 이미지를 현재화하면서도 시간이 축적되어 있다. 한편 작가의 드로잉은 쉽게 교체되며 이 작업 자체를 현재화하는 동시에, 프레임 안에 위치한다는 것만으로도 드로잉의 역사를 기대하게 만든다. 즉, 황유윤은 리폼을 통해 단순히 다른 시간성을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들이 여러 층위의 시간을 동시에 내재함으로써 시간이 뒤섞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그러한 사물이 끊임없이 다시 떠오를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회화를 예고한다.
이제 프레임-이미지는 완전한 평면에 배치된다. 동시에 캔버스에서 배경-사물의 구도로 전환된다. 사물이 놓이는 배경은 허구의 사물들이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장소다. 즉, 황유윤의 회화에서 배경은 사물을 고정하는 뒷배경이 아니라, 사물이 겪는 시간의 흔적을 드러낸다. 더하여 모호한 외곽 처리와 깊은 음영감, 그림자 등을 통해 배경을 완전히 가늠할 수 없도록 만들면서도 거미줄, 먼지와 같은 장치를 통해 시간이 지났음을 알아채도록 한다. 이를테면 <collection)(2024)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그리드와 깊은 음영감은 그 배경을 완전히 가늠할 수 없도록 만듦으로써 ‘잠시’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구현한다. 또 <Wandering stuffs>(2025)에 이르러서는 배경-사물의 관계가 회화에 명징하게 드러난다. 작품 왼편의 가장자리와 일관되지 않게 어긋나는 앞 바닥의 기하학적인 패턴과 방향을 알 수 없는 계단, 또 커튼 뒷편의 암시와 계단 위 공간은 이 장면이 영원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마도 하늘에서 날았을 새, 바다에 떠 있었을 배를 비롯한, 다른 곳에서 다르게 존재해왔을 사물들은 황유윤의 손을 거쳐 완전히 다른 사물로서 이 공간에 모였다.
공간으로서의 캔버스는 사물을 위한 공간도, 황유윤이 사물을 갖기 위한 공간도 아니다. 사물들의 방랑을 캔버스의 평면에서 표현하는 것은 사물이 다른 모양으로, 다른 곳에 배치될 수 있다는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의 장면을 꺼낸 것이다. 회화는 빠르게 다른 배치를 보여주지 않고, 천천히 다른 장면을 그저 상상하게 만든다. 동시에, 어쩌면 사물의 위치와 형상이 영원히 미완에 머무를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하기로서의 회화를 이어가려는 작가의 태도가 엿보인다. 황유윤의 소유는 사물과의 관계맺기를 지속하려는 의지로 완결된다. 그리하여 황유윤은 계속 ‘이곳’을 만들 것이며, 사물과 함께할 것이다.